그리고 근대에 있어서는 산업사회의 발달로 인하여, 그전까지 그리스도교회에 딸려 있거나 또는 귀족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만든 여러 가지 제작물과 퍼포먼스로부터, 문예, 회화, 조각 등의 예술 그리고 음악과 연극이 독립된 가치를 갖는 것으로서 사랑받게 되었다. 그러한 흐름과 병행하여, 지성이 판별하는 것이 '진(眞)'이고, 의지에 의한 행위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 '선(善)'이며, 감성이 기쁨을 느끼는 대상이 '미(美)'라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정식(定式)이 성립한다. 그리고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스 흄이 인간의 인식의 기초에 ('인상'과 그 재현인 '관념'으로 구성된) '지각(知覺)'을 장착시킨 철학을 전개한 것에 촉발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988)에..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들과 훌륭하고 우수하다고 인식된 것들은 드리없이 감상되고 또 논하여져 왔다. 그러나 그 감동의 방식이나 표현 방법은 실로 다양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는 종교나 도덕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름답고 선한 것'(kalokagathon)이라는 합성어를 사용하여, 인생에 도움이 되고 인생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선(善)이자 미(美)라고 논하여졌다. 그것은 이미 '선'과 '미'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전제로서 플라톤은 미 그 자체는 신에 의해서 분배된 것이기에 그것을 실현하는 예술은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의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제시했다. 그리고 중세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
이항대립 구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한계 개념을 계속하여 지명함으로써 탈구축은 해당 구조를 하나의 폐쇄된 영역으로서 그려내고 구조의 '타자'를 부정적으로 가리키기에 이른다. 그러한 '탈구축 불가능한 것'에 대한 탐구는 일종의 '불가능한 것'학(學), 아포리아학, 부정신학과 같은 양상을 보이는데, 그 지점에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탈구축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은 도달점이 아니라 그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결정 불가능한 것이야 말로 하나의 결정이 도래할 수 있는 장소를 선사하는 것처럼, 구조의 '타자'로서 '불가능한 것'을 찾아내는 것은 그 구조의 도식 그 자체를 완전히 다르게 다시 쓰는 찬스를 불러들이기 위한 단서인 것이다. 그것에 대한 가장 미니멀한 요소를 예로 들자면, 그 '불가능한 것'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