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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구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한계 개념을 계속하여 지명함으로써 탈구축은 해당 구조를 하나의 폐쇄된 영역으로서 그려내고 구조의 '타자'를 부정적으로 가리키기에 이른다. 그러한 '탈구축 불가능한 것'에 대한 탐구는 일종의 '불가능한 것'학(學), 아포리아학, 부정신학과 같은 양상을 보이는데, 그 지점에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탈구축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은 도달점이 아니라 그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결정 불가능한 것이야 말로 하나의 결정이 도래할 수 있는 장소를 선사하는 것처럼, 구조의 '타자'로서 '불가능한 것'을 찾아내는 것은 그 구조의 도식 그 자체를 완전히 다르게 다시 쓰는 찬스를 불러들이기 위한 단서인 것이다.
그것에 대한 가장 미니멀한 요소를 예로 들자면, 그 '불가능한 것'에 대하여 차연이든 대리 보충이든 반복(反覆)이든 법(法)이든,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는 그때마다 구체적인 이름이라는 신분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그것들은 결코 자의적으로 선택된 언어나 교환 가능한 개념일 수 없고, 개개의 콘텍스트를 짊어진 역사적 기억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 지명(指名)에는 모름지기 역사에의 응답 그리고 역사에의 개입이 있다. 데리다의 텍스트가 '데리다의 사상'을 그 자체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항시 특정 텍스트를 해독하는 식으로 쓰여진 것은, 그러한 콘텍스트의 요청을 가능한 한 엄격하게 떠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구축은 부정성을 희롱하는 형식적 조작이 아니라, 어떤 '계보학의 작업'으로서 나타난다. 그 계보학 없이는 어떠한 텍스트를 언제, 어디서 읽기 시작하고 끝내는가 또는 어떠한 이름을 떠맡는가, 라는 식의 결정을 결코 내릴 수 없다. 그러나 그 결정은, 이미 방법론화 불가능한 물음으로서 우리들에게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