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와 deconstruction 탈구축(脫構築, deconstruction)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1930~2004)의 사상을 요약하는 키워드로 이미 넓리 유포되어 있다. 그러나 데리다 자신은 그 말을 어떠한 응용 가능한 비평이론이나 철학 또는 문학 해석 방법으로 간주하는 이해에 끝없는 경고를 해 왔다. 탈구축은 단순한 개념이나 이론이 아니고, 체계나 형식도 아니며 기술이나 방법도 아니고, 분석이나 비판도 아니다. 단수의 탈구축이라는 것은 없고, 그것은 언제나 복수이며 어떠한 방법론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라고. 그렇다면 탈구축을 데리다의 사상에 입각한 방법론을 나타내는 말로서 기대하는 것은 단호히 금지되어 있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데리다는 탈구축의 방법론화를 단순하..
구조가 필드(field, 場)나 위치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고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들뢰즈는 구조가 활력을 얻어 움직이기 위해서는 계열에 조직화된 기호 요소가 다른 계열과 관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라캉의 애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유명한 해석을 보면 '편지를 찾을 수 없는 국왕 / 편지를 공공연히 방치한 것 만으로 잘 숨겼다고 여기는 왕비 / 모든 것을 보고 있었고 편지를 훔치는 장관'이라는 제1의 계열에서, '장관의 집에서 편지를 찾을 수 없는 경찰 / 편지를 공공연히 방치한 것 만으로 잘 숨겼다고 여기는 장관 / 편지를 다시 빼앗아 되찾은 뒤팽'이라는 제2의 계열로의 이동이 보인다. 들뢰즈가 '이동은 본래적으로 구조적이거나 기호적이다'라고 ..
과연 구조야말로 역사의 조건인가. 그러나 구조가 역사나 사고의 배후에 숨겨진 본질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조란 '공간'이자 '필드(field, 場)'이고 '위치'에만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들에서 예를 든 '돌'이라는 것으로 다시 생각해 보자면 '돌' 자체 속에 본질적-자연적인 확고한 성질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언어의 체계 안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바위와 모래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등)에 의해 '돌'의 의미나 성질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관계에 대하여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친족관계나 혼인관계에 있어서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친족(혼인)관계에 대한 규칙이 개인의 사회적 신분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