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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가 필드(field, 場)나 위치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고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들뢰즈는 구조가 활력을 얻어 움직이기 위해서는 계열에 조직화된 기호 요소가 다른 계열과 관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라캉의 애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유명한 해석을 보면 '편지를 찾을 수 없는 국왕 / 편지를 공공연히 방치한 것 만으로 잘 숨겼다고 여기는 왕비 / 모든 것을 보고 있었고 편지를 훔치는 장관'이라는 제1의 계열에서, '장관의 집에서 편지를 찾을 수 없는 경찰 / 편지를 공공연히 방치한 것 만으로 잘 숨겼다고 여기는 장관 / 편지를 다시 빼앗아 되찾은 뒤팽'이라는 제2의 계열로의 이동이 보인다. 들뢰즈가 '이동은 본래적으로 구조적이거나 기호적이다'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구조주의가 은유나 환유라는 문채(文彩)에 주목하는 것도 자의적(字義的)인 계열과 비유적인 계열 사이에 있는 이동이 문제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동이 일어나려면 구조내에 공백의 위치가 필요하다. 16조각짜리 슬라이딩 퍼즐에서 15번까지 숫자가 매겨진 퍼즐 조각을 슬라이드 시키려면 16번째 조각을 빼내어 공백을 만들 필요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공백과의 관계로 인하여 모든 계열의 이동이 가능해지고, 물음이 요청되는 것이다. 

 

 푸코가 "말과 사물"의 첫 머리에서 지적하는 '국왕의 장소',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언급한 '마나', 라캉이 '팔루스'라고 부르는 것이나 "도둑맞은 편지"에서의 '편지'. 그것들은 모두 구조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공백으로서의 zero기호인 것이다. 그것들은 이동을 전제로 하기에 어떤 자기동일성이나 특권도 갖지 않고 주체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흩뿌린다. 

 

 그런 식으로 구조주의에 있어서의 zero기호는, 인간이나 '주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라고 격하게 재촉한다. 그렇기에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공백은 공간의 주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곳에서 드디어 새롭게 사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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