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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의 턴(turn, 전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을 동성애자라고 규정하는가? 많은 이성애자는 그것을 동성과 성행위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어떤 사람이 '나는 실수로 한 번 동성과 섹스를 한 적이 있지만, 동성애자는 아니다'라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두 번이라면? 세 번이라면? 열 번이라면? 삼십 번이라면? 또는 '나는 주 1회 동성과 섹스를 하지만, 나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기에 사실은 이성애자다'라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지금 기술한 내용은 '동성애자'라는 정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인데,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성행위라고 해야 하는가 라는 것조차 (침대에 들어가는 것? 손을 잡는 것?)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로 정의하기 힘들다.
우리들은 이미 성행위를 한정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기에, 성행위라는 것으로 동성애자를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젠더라는 것을 사용하여 동성애자를 정의하려 하고 있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남자다움이고,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여자다움이기에 그 규범에서 벗어나는 자는 동성애자라고.
생물학적인 성별이 섹스이고, 그 위에 만들어진 문화나 사회적인 구축물이 젠더라고 하는 페미니즘의 상식은, 퀴어이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일종의 타협적 절충점으로서 논의를 진행시켜왔다. 예를 들자면 여자가 '사회생활 속에서 차를 따르는 행위'는 구축된 젠더이기에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여자라는 성별을 인식의 기반으로서 인정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곳에는 그 어떠한 '남자에게는 없는 여자다움'이 존재한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개혁을 주장해도, 젠더의 구조 그 자체는 보존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여성다움과 나쁜 여성다움이라는 것이 있고, 나쁜 여성다움을 시정해야 한다는 논점은 전략적으로는 유효하고 의의가 있지만, (그것이 여성 자신에 의해서 정할 수 있다고 하여도) '여성다움'의 존재를 애초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면 '여자는 여자답게'라는 규제를 최종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역설에 대하여, 섹스라는 기반을 바탕으로 젠더가 구축된다는 기반주의를 비판하고, 오히려 우리들의 섹스와 성별에 대한 인식은 젠더에 이미 사전에 오염되어서 (즉 젠더화 되어서) 성립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 버틀러이다.
여기서 일단 '정상'적인 신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다. 완전히 완벽한 미녀나 미남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듯이, 우리들이 실제로 신장을, 체중을, 가슴둘레를, 다리 길이를 정의하려고 할 때, 이것이 '정상'이라는 수치도 이 정도에서 저 정도까지가 '정상'이라는 값도 내밀 수 없다. 개개인의 신체를 고려해 볼 때, 그 신체는 언제나 어딘가가 (그리고 온갖 곳이) 볼 품 없고 불만족스럽다.
그리하여, 그러한 정상을 정의하는 대신에 우리들이 무엇을 하는가 하면, '비정상'의 신체를 (예를들어 '장애인'으로서) 정의하여, 그 '비정상'적인 신체가 아닌 것을 명시적인 정의 없이 '정상'적인 신체로 간주한다. '정상'이라는 것이 정의 불가능하기에 그 외부에 제물처럼 세워지고 정립당하는 '비정상'을 만드는 것이다. 버틀러는 그것을 '구성적 외부'라고 불렀다.
성별은 '이미 언제나' 젠더화 된다는 버틀러의 논의는, 예를 들어 '남녀 추니'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왜 우리는 남자나 여자로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라는 의문으로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또는, 우리들은 왜 모든 인간에 대하여 남녀 성별이 구분이 되고, 또 그 성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또는, 예를 들어 달팽이가 양성구유일 때 그리고 많은 물고기들이 치어 상태에서 암수가 결정되지 않고 성장 과정에서 결정 날 때, 우리들은 왜 그것을 '예외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자연계의 수많은 생물을 고려할 때, 암컷과 숫컷이라는 양성생식으로 다음 세대를 잇는 생물은 (적어도 숫자에 있어서는) 오히려 소수파임에도 왜 우리들은 단성생식을 오히려 '예외'로 취급하려 하는가.
우리들은 성별이란 두 가지가 있고, 그 중 하나의 성별에 평생 고정되어 있기에 성별이란 그 개체에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별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했다기보다는 남녀 이항대립이라는 젠더의 관점을 통하여 이해하려 하고 있다고 버틀러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섹슈얼리티는 서로 상보적인 남녀라는 이항의 이론 틀에 상시 선행하며 물든 형태로 이해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는 무척 다형적이고 정의 불가능한 것임에도 우리들은 섹슈얼리티도 젠더 화하여 이해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구성적 외부로서 터부화 된 동성애자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정상'적인 신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정상'적인 섹슈얼리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역으로 말하면 모든 섹슈얼리티는 똑같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기어코 깨달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버틀러적인 퀴어 이론의 요지이다.
그 논의는 젠더의 기반을 무너뜨리며 젠더란 철두철미하게 구축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버틀러는 젠더란 각각의 행위에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부여된 것을 반복함으로써 행위의 배후에 젠더화 된 '남자'나 '여자'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 를 가장하는 해석의 프로세스이자, 무의식적으로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남녀를 분별하는 시선의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행위로써의 젠더를 그 기반이 되는 주체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역으로 행위로부터 주체가 상상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그 개념은 젠더 퍼포머티비티(performativity, 수행성)라고 불린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같다고 주장하기 위해 기존의 주체 개념을 무너뜨린 버틀러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동성애자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는 점과, 특히 정치적인 유효성에 있어서 적지 않은 비판도 받고 있다. 그러나 버틀러의 논의가 이후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그 결과로 퀴어 이론이라는 분야가 성립되는데 공헌했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