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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피앙과 주체

 

 

 자크 라캉은 다음과 같은 욕망의 주체와 시니피앙의 작용 및 관계에 관한 유명한 정식(定式)을 남겼다. 그것은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에 대하여 주체를 대표(代理表象)한다'라는 명제이다. 즉 그것은, 욕망을 떠맡고 있는 기호는 욕망의 주체를 그대로 나타낼 수가 없고, 하나의 욕망의 기호는 다른 기호에 대하여, 욕망의 주체를 대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시니피앙은 언제나 다른 시니피앙과 차이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욕망의 주체는 하나의 시니피앙으로 자신의 욕망을 의미할 수 없다고 그 명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시니피앙, 자신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물로서의 시니피앙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의미'는, 그 시니피앙이 다른 수많은 시니피앙과 매개하는 관계에 기반함으로써만 의미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백화점 상품 디스플레이에 늘어선 각양각색의 하이힐 구두가 있다고 하자. 그 하이힐들이 열대어처럼 서로 광채를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상품의 상호 반영에 의하여 '갖고 싶은 것'으로서의 가치를 서로 상승시키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중 하나를 당신이 '갖고 싶다'라고 생각하여 열대어 한 마리 낚아 올리듯 상품 하나를 건져 올려도, 그 손 안의 하이힐의 의미는 바로 전에 서로가 반짝이며 다른 하이힐 사이에서 만들어낸 의미 작용의 반영을 더 이상 떠맡고 있지 않다. 

 

 '욕망의 주체'를 대문자 S (Sujet의 S), 시니피앙을 소문자 s1, s2, s3, ...sn 과 같이 표기한다면, 그 도식은 분수식으로 S(좌에서 대각선으로 사선, 욕망의 주체) 분의 s1→s2→s3→...→sn 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 도식의 분모에 위치한 '욕망의 주체 S '에 대하여, 주체의 욕망의 의미 작용을 떠맡는 시니피앙 s1, s2, s3, ...sn 은 상호적으로 네트워크로 엮여서 의미 작용을 만들어낸다. 그 라캉 도식에서는 '욕망의 주체 S'에 사선이 그어져 있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욕망의 주체라는 것은 언어를 통해 즉 시니피앙을 통해서만 자신의 욕망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는 표시이다.

 그 도식은 '욕망의 주체'는 자기의 욕망을 '기호'라고 하는 (다른 사람들, 다른 화자, 다른 기호의 사용자로서의) '타자의 차원'을 통해서만 의미할 수 있다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원(原) 억압'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주체의 욕망'의 시니피앙으로서의 '원하는 것'은 다른 시니피앙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 작용을 성립시킬 수 있다.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다른 것들 쪽으로 언제나 이미 도망쳐 달아나 버린다. '원하는 것'의 의미는 언제나 시니피앙의 네트워크 속으로 소멸하려 하고 있다. 

 


 

  메타포와 메토니미(metonymie)

 

 

 그러나, 그러한 시니피앙의 '의미'의 호명은 주체에게 욕망의 시니피앙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즉 암시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없는 데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주체의 욕망'의 진정한 대표로서의 시니피앙.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있다'라고 주체는 '생각'하고 '그것 만은 갖고 싶다고 생각' 하지만, 주체의 '기쁠 것 같다'는 기쁨이란 실은 시니피앙 전체의 유희에서만 그 소재를 자명하게 할 수 있다. 그러한 대단히 역설적인 상황에 인간의 욕망은 놓여있는 것이다.

 

 라캉은 그러한 욕망의 시니피앙이 만드는 연속적인 관계 즉, s1의 기호는 s2, s3, sn 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는 횡(橫)의 관계를 '메토니믹(metonymic, 환유적인)한 관계'라 불렀다. 그에 반해 욕망의 주체와 그것을 대표하는 시니피앙의 종(縱)의 관계인 분자 항과 분모 항인 주체 S와의 관계를 '메타포릭(metaphoric, 은유적)인 관계'라고 부르며 구별했다. 

 

 욕망의 시니피앙은 욕망의 주체를 대신하여 치환과 메타포의 관계에 있는데, 그 주체의 '의미'는 주체를 대리하는 시니피앙과 다른 시니피앙과의 연쇄에 의한 메토니미(화유)의 관계로서만 실현된다. 나의 욕망의 진정한 의미, 즉 자신의 욕망의 진리는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도달한다는 것이다.

 

 내가 몸에 걸치고, 나를 감싸고,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수많은 표식은, 내 욕망의 '진리'의 대리인 메타포로서 나의 욕망을 이미지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인데, 그 표식의 의미는 실은 다른 모든 이미지의 네트워크 작용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갖고 싶은 것이 갖고 싶다'라는 욕망의 논리는 그러한 이미지 작용의 회로에 숙명적으로 몸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갖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은 언제나 도망치며 사라지는 '욕망의 진리'의 '결여의 기호'로서만 존재한다. '원하는 것'을 '것'의 무한 연쇄를 통해서 계속 추구하는 것도, 단 하나의 '정말 원하는' 것을 부채의 형태로 계속 추구하는 것도 모두, 시니피앙에서 시니피앙으로 '것'에서 '것'으로 같은 무한의 욕망 게임으로 주체를 유도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욕망의 논리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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