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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거칠게 말하면, 탈구축의 대상이란 모든 이항대립에 해당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사고의 모든 틀이라고도 할 수 있다(왜냐하면 이항대립을 매개하지 않는 사고란 불가능하니). 이항대립이라 하면 자기/타자, 현전/부재, 동일성/ 차이, 정신/물질, 내부/외부, 능동/수동 같은 추상적인 것부터, 의미/기호, 음성/문자, 자의(字義)적/비유적, 자연/문화, 동물/인간, 남자/여자, 친구/적, 서양/동양과 같은 구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제한이 없다. 탈구축의 제1의 작업은 그러한 무수한 이항대립이 어떻게 우리들의 사고에 침투하여 사고의 틀을 지배해 왔는가 자세히 분석하는 데 있다. 

 

 우선은 그 어떠한 이항대립도 일종의 언어적 현실이고, 주어진 언어로부터 독립된 자연적인 실체나 본질일 수는 없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항대립의 확립은 필히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고, 그것은 다른 여러가지 쌍을 이루는 개념들과의 '차이의 그물망' 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혹은 이항대립의 사용은 언제나 일정한 콘텍스트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이항대립도 절대적으로 안정된 기초를 소유할 수 없다는 인식을 예기(豫期)하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논증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러한 이항대립이 꽤나 이론적으로 중립화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일정한 히에라르키로서 가치가 부여되고 계층화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동적인 구조로서 조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포인트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A / B라는 대립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때 일견 A가 B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단순히 우열을 역전시켜서 A를 대신하여 B의 복권을 주장하려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우선, A의 우위성은 '그것에 상대적인 B의 저항을 매개함으로써 오히려 보완되고 한 층 강화되며 회귀한다'는 구조가, 주어진 콘텍스트에 입각하여 가능한 한 엄밀하게 분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구조가 강고하면 강고할수록 A의 우위성은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한편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 A의 우위가 B와의 관계에 본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B의 위치는 A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내적인 가능성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B의 위치를 해소하고 A의 우위를 최종적으로 달성하는 것은 바로 그 우위 그 자체의 자기파괴이기도 하다. 즉, B의 위치는 A의 우위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인 동시에 그 불가능성의 조건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논리(전통적으로는 변증법이라 불린다)를 더듬어가는 것 만으로는 결코 A의 우위 그 자체를 파괴시킬 수 없다. 하지만 그 논리를 극한까지 엄격하게 받아들임으로서(그것은 일종의 보수적인 견지까지 나타내는 것이지만), A/B라는 대립의 히에라르키에 본질적으로 동적인 구조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고, 끊임없이 한 편의 우위성에 지속적으로 유보함을 추가함으로써 그 우위의 실질을 안 쪽으로부터 발골하는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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